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관련 기록
본문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1425 - 1521)의 내외손이나 친인척의 묘갈, 묘표, 묘지나 행장, 유사 등에 기록된 휴계선생의 기록을 발췌하여 모은 것입니다. 작자의 생년 순으로 정리하였습니다.
1. 「從祖叔父訥齋先生遺事」[1], 《倻溪集》
야계(倻溪) 야성(冶城) 송희규(宋希奎, 1494 - 1558)[2]
"...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옥천전씨(沃川全氏)로 관성군(管城君) 유(侑)의 후예이며 생원시와 진사시에 구중(俱中)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호군(護軍)을 지낸 희철(希哲)의 따님이다. 부녀(婦女)서의 행적이 몹시 훌륭하여 군자(君子)에 견줄 수 있었다. 선생께서 일찍이 병을 핑계삼아 집안의 일을 돌보지 않은 고로 의인(宜人)께서 안으로는 돕고 밖으로는 단속하여 봉접(奉接)하는 일이 모두 의(義)에 부합하였다. 자녀를 가르치매 자상함과 엄정함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부모께 정성으로 효도하여 출가하였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선생보다 4년 늦게 태어나 4년 늦게 졸했으니 수(壽)가 또한 71세였다. 쌍묘(雙墓)로 부좌(祔左)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다. ..."
配宜人沃川全氏。管城君侑之後。生進武護軍希哲之女。婦行甚茂。克媲君子。先生旣托疾。不顧家務。而宜人內助外檢。奉接之道。咸得其宜。訓子女慈嚴幷至。孝父母之誠。不以已嫁而少衰。後先生四年以生卒。壽亦七十一。祔左爲雙墓。有子男四人。
2.「生員宋公墓碣」[3], 《嘯皐集》
소고(嘯皐) 반남(潘南) 박승임(朴承任, 1517 - 1586)[4]
"... 공은 옥천전씨(沃川全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통정대부(通政大夫) 희철(希哲)의 따님이요 봉례랑(奉禮郞) 예(禮)의 손녀이며 전서(典書) 광원(光遠)의 증손이고 전적(典籍) 문손관(文孫貫)의 외손이다.[5] 공이 일찍이 병을 핑계하였을 때 집안의 일을 돌아보지 못하였으니 일을 처치하는 데 있어 마땅함과 빈객을 응접하는 일에 있어 훌륭한 것이 오로지 전씨의 내조에 기인한 것이었다. 덕을 갖추고 어버이께 효도하며 자식을 사랑하였으니 부녀(婦女)이 표본이 되었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년)에 태어나 공이 돌아가시고 5년 뒤인 무자년(1528년)에 수(壽) 71세로 서거하셨다. 공의 묘소에 부좌(祔左)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다. ..."
公聘沃川全氏。通政希哲之女。奉禮郞禮之孫。典書光遠之曾孫。典籍文孫貫之外孫。公旣病。不顧家務。凡措置之宜。應接之善。惟內助是倚。德備孝慈。作範鄕閫。生天順戊寅。公沒後五年戊子。壽七十一而逝。祔塋公墓之左。男四人。
3. 「通政大夫宋公墓碣」[6], 《竹牖集》
죽유(竹牖) 고창(高敞) 오운(吳澐, 1540 - 1617)[7]
"합천(陜川) 야로현(冶罏縣)으로부터 나온 송씨는 영남(嶺南)의 이름난 가문인데 영천(榮川)에 있으면서 자손이 더욱 번성하였다. 공의 휘(諱)는 엄(儼)이요 자(字)는 사중(思仲)이다. 증조 수겸(守謙)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조부 륜(綸)은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석충(碩忠)은 생원(生員)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희철(全希哲)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성화(成化) 병오년(1486년) 공을 낳았다. 형제 중 공이 가장 맏이이다. ..."
宋氏系出陜川冶罏縣。爲嶺南名宗。而其在榮川者。子孫尤蕃衍。公諱儼字思仲。曾祖諱守謙縣監。祖諱綸縣令。考諱碩忠生員。娶通政全希哲之女。以成化丙午生公。於兄弟行公最長。
4. 「鶴溪全公墓碣」[8], 《龜窩集》
구와(龜窩) 의성(義城) 김굉(金㙆, 1739 - 1816)[9]
"공의 휘(諱)는 해(海)요 자(字)는 대용(大容)이며 성(姓)은 전씨이니 고려 때 동정(同正)을 지낸 학준(學浚)이 그 웃 조상이다. 중세에 유(侑)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옥천군(沃川君)에 봉해지니 자손들이 이로써 관향을 삼았다. 증조 희철(希哲)은 상호군(上護軍)으로 영천(榮川)에 이거하였으며 조부 박(珀)은 현릉(顯陵) 참봉(參奉)을 지냈다. 아버지 응삼(應參)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구중(俱中)하였는데 뛰어난 정취를 지녀 호(號)를 칠리수(七里叟)라 하였다. 어머니는 원성변씨(妣原城邊氏)로 교수(敎授)를 지낸 이(廙)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병신년(1536년)에 공을 낳았다. ..."
公諱海字大容。姓全氏。高麗同正諱學浚。卽其上祖也。中世有諱侑。版圖判書上護軍封沃川君。子孫因以爲貫。曾祖諱希哲上護軍。移居榮川。祖諱珀顯陵參奉。考諱應參。俱中生進。有高趣。號七里叟。妣原城邊氏。敎授廙女。以嘉靖丙申生公。
5. 「敬默齋全公家狀」[10], 《悅菴集》
열암(悅菴) 달성(達城) 하시찬(夏時贊, 1750 - 1828)[11]
"공의 휘(諱)는 창정(昌鼎)이요 자(字)는 이삼(而三)이며 성(姓)은 전씨이니 옥천인(沃川人)이다. 고려조에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진 유(侑)가 곧 그 시조이다. 희철(希哲)은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이고 박(珀)은 현릉(顯陵) 참봉(參奉)이며 응삼(應三)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구중(俱中)하였으나 명종조에 권간(權奸)을 미워하여 더 이상 벼슬하지 않고 자연을 방랑하면서 호(號)를 칠리수(七里叟)라 하였다. 해(海)는 효행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를 받아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지냈다.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역임할 때, 권세가가 불례(不禮)함을 보고는 단출히 귀향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호(號)를 학계산인(鶴溪散人)이라 했다. 시헌(時憲)은 선교랑(宣敎郞)으로 공의 고조이며 증조는 유경(有慶)이요 조부는 극명(克明)이고 아버지는 숙(璹)이니 모두 효성과 우애로 이름났다. 어머니는 달성하씨(達城夏氏)로 의영고(義盈庫) 직장(直長)을 지낸 후승(侯勝)의 후예이고 무과에 오른 현행(顯行)의 따님이니 숭정(崇禎) 두 번째 경진년(1700년) 2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
公諱昌鼎字而三。姓全氏。沃川人。高麗版圖判書管城君諱侑。卽其始祖也。諱希哲弘文舘副提學。諱珀。顯陵參奉。諱應三。生進幷中。明廟朝。忤權奸廢擧自遯。放浪山水。號七里叟。諱海。西涯柳公薦以孝。歷通禮院引儀。轉漢城參軍。至一權貴門。見其不禮。破帽歸鄕。終身不仕。自號鶴溪散人。諱時憲宣敎郞。寔公高祖。曾祖諱有慶。祖諱克明。考諱璹。皆以孝友名。妣達城夏氏。義盈庫直長諱侯勝之後。武科諱顯行之女。以崇禎再庚辰二月十一日生公。
6.「司諫院正言雪月堂全公行狀」[12], 《新野集》
신야(新野) 진성(眞城) 이인행(李仁行, 1758 - 1833)[13]
"공의 휘(諱)는 익희(益禧)요 자(字)는 자수(子綏)이며 전씨로 옥천인(沃川人)이다. 고려조에 동정(同正) 벼슬을 지낸 학준(學浚)의 후손이다. 중세에 유(侑)는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로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으며, 유는 광운(光韻)을 낳으니 이부전서(吏部典書)이다. 광운은 사복소경(司僕少卿) 비(備)를 낳았고 비는 통례문(通禮門) 봉례(奉禮) 귀덕(貴德)을 낳았으며 귀덕은 지인(知印) 부록사(副錄事) 예(禮)를 낳았다. 예는 희철(希哲)을 낳았으니 생원시와 진사시에 구중(俱中)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을 섬겨 관직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단종께서 왕위를 사양하시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뜻을 잃고 마침내 영천(榮川) 휴천(休川)[14]으로 낙향했다. 이후 노직(老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陞資)되었으니 공의 5세조이다. 고조 박(珀)은 참봉(參奉) 벼슬을 지냈고 증조 응두(應斗)는 생원(生員)으로 호(號)가 송파(松坡)였으며 조부 개(漑)는 직장(直長)에 올랐는데 호(號)가 망일당(望日堂)이었다. 아버지는 뢰(磊)로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진양정씨(晉陽鄭氏)로 군수(郡守)인 호인(好仁)의 따님이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척(陟)의 현손이니 만력(萬曆) 무술년(1598년) 4월 2일에 공을 낳았다.
公諱益禧。字子綏。全氏沃川人。麗朝同正諱學浚之後。中世有諱侑。奉翊大夫密直副使版圖判書。封管城君。是生吏部典書諱光韻。是生司僕少卿諱備。是生通禮門奉禮諱貴德。是生知印副錄事諱禮。是生諱希哲。生進武科。事世宗文宗。官禦侮司直。端廟遜位後無意仕進。遂長歸于榮川休川里。後以大耋陞通政。是爲公五世祖。高祖諱珀。參奉。曾祖諱應斗。生員。號松坡。祖諱漑。直長。號望日堂。考諱磊。奉事。妣晉陽鄭氏。郡守好仁女。大提學陟之玄孫。以萬曆戊戌四月二日生公。
7.「處士全公墓碣銘」[15], 《海隱遺稿》
해은(海隱) 진주(晉州) 강필효(姜必孝, 1764 - 1848)[16]
"공의 휘(諱)는 익수(益遂)요 자(字)는 자현(子顯)인데 처음 휘(諱)는 익달(益達)이요 자(字)는 자겸(子兼)이었으니 관산(管山)의 전씨라. 고려조 동정(同正)을 지낸 학준(學浚)을 비조(鼻祖)로 한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희철(希哲)은 관직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는데 단종께서 왕위를 사양하실 때 벼슬을 물리치고 호서(湖西)의 옥천(沃川)으로부터 영남(嶺南) 구성(龜城)[17]의 휴천(休川)으로 이거한 뒤 은둔하여 다시 나오지 않았으며 호(號)를 휴계(休溪)라 하였다. 희철은 박을 낳았으니 침랑(寢郞)을 지냈으며, 박은 응두(應斗)를 낳았으니 생원(生員)으로 호(號)가 송파(松坡)이며 휴천(休川)으로부터 망동(望洞)[18]에 이거하였다. 응두는 직장(直長) 개(漑)를 낳았고 개는 봉사(奉事) 뢰(磊)를 낳았으니 이가 곧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진주정씨(晉州鄭氏)는 군수(郡守) 호인(好仁)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경술년(1610년)에 공을 낳았다. 형제는 6명이니 공은 그 중 넷째이다. ..."
公諱益遂字子顯。初諱益達字子兼。管山之全。以麗朝領同正學浚爲鼻祖。入我朝。有諱希哲官司直。値端廟遜位。遂謝仕。自湖之沃川。卜居于嶺之龜城休川里。隱不出。號休溪。生諱珀寢郞。生諱應斗生員號松坡。自休川移居望洞。生諱漑直長。生諱磊奉事。是爲公考。妣晉州鄭氏。郡守好仁女。以萬曆庚戌生公。昆弟六人。在次第四。
8. 「司諫院正言雪月堂全公墓碣銘」[19], 《逸圃集》
일포(逸圃) 반남(潘南) 박시원(朴時源, 1764 - 1842)[20]
"... 삼가 생각컨대, 공의 휘(諱)는 익희(益禧)요 자(字)는 자수(子綏)이며 성(姓)은 전씨로 옥천인(沃川人)이다. 고려조에 동정(同正)을 지낸 학준(學俊)이 그 시조이다. 중세에 유(侑)는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로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지니 이로써 전씨가 마침내 크게 현달하였다. 5세를 지나 희철(希哲)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구중(俱中)하고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경태(景泰) 을해년(1455년) 이후 옥천(沃川)으로부터 영천(榮川)에 이거하여 은둔하였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희철은 박(珀)을 낳았으니 박은 현릉(顯陵) 참봉(參奉)을 지냈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응두(應斗)는 생원(生員)으로 호(號)가 송파(松坡)이며 조부 개(漑)는 직장(直長)으로 호(號)가 망일당(望日堂)이었다. 아버지는 뢰(磊)는 봉사(奉事)에 올랐으며 어머니는 진양정씨(晉陽鄭氏)로 군수(郡守) 호인(好仁)의 따님이고 대제학(大提學) 척(陟)의 현손이니 만력(萬曆) 무술년(1598년) 4월 2일에 공을 망동(望洞)의 집에서 낳았다. ..."
謹按公諱益禧。字子綏。姓全氏。沃川人。麗朝同正諱學俊。其始祖也。中世有諱侑。密直副使版圖判書管城君。全氏遂大顯。歷五世有諱希哲。生進武科。景泰乙亥後。自沃移隱于榮。大耋陞通政。是生諱珀。顯陵參奉。於公爲高祖。曾祖諱應斗。生員號松坡。祖諱漑。直長號望日堂。考諱磊奉事。妣晉陽鄭氏。郡守好仁女。大提學陟之玄孫。以萬曆戊戌四月二日。生公于望洞里第。
9. 「孝子全君行狀」[21], 《逸圃集》
일포(逸圃) 반남(潘南) 박시원(朴時源, 1764 - 1842)
"... 삼가 생각컨대, 효자(孝子)의 이름은 중발(重發)이요 자(字)는 여실(汝實)이니 옥천인(沃川人)이다. 여말선초에 유(侑)는 전서(典書)를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으로 봉해졌으니 그 비조(鼻祖)가 된다. 관성군 후 5세를 지나 희철(希哲)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지내고 영천(榮川) 휴천(休川)에 살기 시작했다. 또 3세를 지나 응벽(應璧)은 참봉(參奉) 벼슬을 하였는데 집안이 거촌(巨村)[22]에 있게 된 것은 곧 공이 처음이었다. 증조는 극현(克賢)이요 조부는 유삼(有三)이며 아버지 상록(尙祿)은 노직(老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효자는 그 중 막내이다. 영조 계미년(1763년)에 태어나 금상(今上, 순조) 신미년(1811년) 2월 16일에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
謹按孝子名重發。字汝實。沃川人。勝國時有諱侑。典書管城君。其鼻祖也。管城君後五世。有諱希哲通政。始居榮川休川里。又三世有諱應璧參奉。其家巨村自公始。曾祖諱克賢。祖諱有三。考諱尙祿。老僉樞。妣淑夫人淸州鄭氏。有子男五人。孝子居其季。以英廟癸未生。以當宁辛未二月十六日卒。得年四十九。
10. 「參奉全公渫行狀」[23], 《重山齋集》
중산재(重山齋) 연안(延安) 이지수(李趾秀, 1779 - 1842)[24]
"... 생각컨대, 공은 관성인(管城人)이다. 고려 태조 때 태사(太師)를 지내고 시호가 충렬(忠烈)인 이갑(以甲)이 전씨의 비조(鼻祖)이며 그 후손인 학준(學浚)은 영동정(領同正)의 벼슬에 올랐다. 3세를 지나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유(侑)가 처음 관성군(管城君)으로 봉해지고 대대로 벼슬에 올랐다. 희철(希哲)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구중(俱中)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외방(外防)의 직책을 지냈는데, 단종께서 왕위를 사양하시자 은거하여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그 5세손이다. 고조 호(琥)는 내자시(內資寺) 첨정(僉正)에 올랐고 증조 사영(賜頴)은 사과(司果)의 벼슬을 지냈으며 조부 안(安)은 사용(司勇)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천성(天性)으로 선교랑(宣敎郞)이며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직장(直長) 벼슬을 한 이수(頤壽)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계해년(1563년) 3월 15일에 태어났다. ..."
按公管城人。麗祖太師忠烈公以甲。是爲全氏之鼻祖。後孫學浚領同正。歷三世至版圖判書侑。始封管城君。又世襲簪組。至諱希哲。中生進兩試。又登武科歷閫任。當端廟遜位之日。隱而不仕。公其五世孫也。高祖諱琥內資寺僉正。曾祖諱賜頴司果。祖諱安司勇。考諱天性宣敎郞。妣興陽李氏。直長頤壽之女。公以嘉靖癸亥三月十五日生。
11. 「成均生員野翁全公應房墓碣銘」[25]
가간(可澗) 진성(眞城) 이만익(李晩翊, 1799 - ? )[26]
"공의 휘(諱)는 응방(應房)이요 자(字)는 이기(而紀)로 성(姓)은 전씨이니 신라 정선군(旌善君) 선(愃)으로부터 나왔다. 고려조에 학준(學浚)은 영동정(領同正)을 지냈고 그 후손 유(侑)는 판서(判書)의 직책으로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지니 자손들이 이로써 관향을 삼았다. 5세를 내려와 희철(希哲)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구중(俱中)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직(司直) 상장(上將)에 이르렀으나 경태(景泰) 을해년(1455년) 울음을 억누르고 육신(六臣)과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작별한 뒤 강주(剛州)의 휴천(休川)으로 은둔하였다. 호(號)를 휴계(休溪)라 하였으며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으니 곧 공의 조부이다. 아버지 박(珀)은 참봉(叅奉)을 역임했으며 어머니 공인(恭人) 영양김씨(英陽金氏)는 통찬(通贊)을 지낸 철우(哲友)의 따님으로 홍치(弘治) 계축년(1493년) 공을 낳았다. 형제는 5명으로, 공은 그 중 둘째다. ..."
公諱應房。字而紀。姓全氏。系出新羅旌善君諱愃。麗朝有諱學浚。領同正。傳至諱侑。以判書。封管城君。子姓仍貫。五世有諱希哲。生進登武科。官至司直上將。景泰乙亥。掩涕別六臣於慶會樓下。遯于剛州之休川。號休溪。享方山院。寔公王考。考諱珀。叅奉。妣恭人英陽金氏。通贊哲友女。弘治癸丑生公。兄弟五人序居二。
12. 「學生全公始萬墓表」[27], 《淵齋集》
연재(淵齋)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 1836 - 1905)[28]
"... 공은 옥천인(沃川人)으로 고려 태사(太師) 충렬공(忠烈公) 이갑(以甲)의 혈통이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유(宥)가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져 자손이 이로써 적(籍)을 삼았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희철(希哲)은 단종께서 왕위를 사양하실 때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여러 세대를 전하여 설(渫)은 참봉(參奉)을 지내고 호(號)를 고산(孤山)이라 하였는데 일찍이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門人)이 되어 학행과 지절(志節)로 동배(同輩)로부터 추앙받았으니 곧 공의 증조가 된다. 조부 길승(吉承)은 장악원(掌樂院) 정(正)으로 추증되었고 아버지 명원(命元)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니 문간공(文簡公)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29]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그 숨은 은덕을 밝혔다.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로 식(湜)의 따님인데, 한산군(漢山君) 인옥(仁沃)이 그 먼 조상이다. ..."
公沃川人。胄於高麗太師忠烈公諱以甲。至版圖判書諱宥。封管城君。子孫仍籍焉。入我朝。有諱希哲。當端宗遜位之日。棄官歸隱。屢傳至諱渫。參奉。號孤山。早遊重峯趙先生之門。學行志節。儕流推重。寔公曾大父也。大父諱吉承。贈掌樂院正。考諱命元。贈左承旨。剛齋宋文簡公銘其墓。表章潛德。妣漢陽趙氏。湜女。漢山君仁沃。其遠祖也。
13. 「通訓大夫行洪原縣監沃川全公宙墓碣銘」[30]
류천(柳川) 진성(眞城) 이만규(李晩煃, 1845 - 1920)[31]
"판관(判官)을 지내고 호(號)가 설봉(雪峰)인 전공의 휘(諱)는 주(宙)이고 자(字)는 태허(太虛)이니, 신라 때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진 선(愃)이 그 웃 조상이다. 고려 초 이갑(以甲)은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공훈이 있었고 견훤(甄萱)의 난에 순절하니 시호가 충렬(忠烈)이었다. 유(侑)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진즉 자손들이 옥천(沃川)을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에 이르러 귀덕(貴德)은 통례문(通禮門) 봉례(奉禮)를 역임했고 그 아들 예(禮)는 지인(知印) 가각부록사(架閣副錄事)를 지냈다. 예의 아들 희철(希哲)은 생원시, 진사시를 구중(俱中)하고 무과에 올라 관직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울면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사람들과 작별하고는 옥천에서 영주(榮州)로 이거하여 호를 휴계(休溪)라 했다. 희철의 아들 호(琥)는 생원(生員)으로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덕유산(德裕山)으로 피해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 아들 사영(賜穎)은 사과(司果)의 관직에 올랐으며 부사(府使)를 지낸 유경(庾京)의 따님 무장유씨(茂長庾氏)를 아내로 맞아 홍치(弘治) 신유년(1501년) 어느 달 어느 날에 옥천 양산(陽山)[32]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判官號雪峰。全公諱宙。字太虛。新羅旌善君諱愃。其上祖也。麗初諱以甲。佐太祖有勳。殉節於甄萱之亂。諡忠烈。諱侑版圖判書。 封管城君。子孫因以氏焉。入本朝。諱貴德。通禮門奉禮。子諱禮。知印架閣副錄事。子諱希哲。生進武科。官止司直。端廟遜位。泣別成朴諸公。自沃移榮。號休溪。子諱琥。生員僉正。戊午禍作。避居德裕山中。以終老。子諱賜穎。司果。娶茂長庾氏。府使諱京女。以弘治辛酉某月日。生公于沃川陽山里第。
14.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採芝齋全公彛憲墓碣銘」[33]
시산(時山) 풍산(豊山) 류동준(柳東濬, 1859 - 1939)
"공의 휘(諱)는 이헌(彝憲)이요 자(字)는 윤보(倫甫)이며 호(號)는 채지재(採芝齋)이다. 성(姓)은 전씨이니 고려 때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학준(學浚)이 곧 비조가 된다. 판서(判書) 유(侑)에 이르러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지니 자손들이 이로써 관향을 삼았다. 고조 희철(希哲)은 관직이 사직(司直) 상장(上將)으로 단종께서 왕위를 사양하실 때 육신(六臣)과 울며 작별하고 영주(榮州)의 휴천(休川)으로 숨어들었으며 호(號)를 휴계(休溪)라 하였다. 방산사(方山祠)에 제향되고 숙모전(肅慕殿)에도 배향되었다. 증조 박(珀)은 참봉(參奉)이며 조부 응방(應房)은 생원(生員)으로 호(號)가 야옹정(野翁亭)이다. 퇴도선생(退陶先生) 이황(李滉)이 손수 제영(題詠)과 저월당(貯月塘), 장춘오(藏春塢) 두 편액을 써주셨다. 배위(配位)는 풍산류씨(豊山柳氏)로 이판(吏判)에 추증된 자온(子溫)의 따님인데 자녀가 없었다. 이에 종손(從孫)이 예조(禮曹)의 허가로 후사를 이었으니 곧 공이다. 본래 조부는 응삼(應參)으로 생원시와 진사시를 구중(俱中)하고 호(號)가 칠리수(七里叟)였으며 아버지는 해(海)로 인의(引儀)를 지냈다. 생모는 의인(宜人) 풍산류씨(豊山柳氏)로 귀촌선생(龜村先生) 경심(景深)의 따님이니 만력(萬曆) 기묘년(1579년) 공을 낳았다.
公諱彝憲。字倫甫。號採芝齋。姓全氏。高麗領同正諱學浚。乃鼻祖也。至判書諱侑。封管城君。子孫仍貫。高祖希哲。官司直上將。端廟遜位。泣別六臣。遯于榮之休川。號休溪。享方山祠。配肅慕殿廡。曾祖珀。參奉。祖應房。生員。號野翁亭。退陶先生手書題詠及塘塢二扁。配宜人豊山柳氏。贈吏判子溫女。無育。以從孫。依禮斜承嗣。寔公也。本生祖應參。生進。號七里叟。考海。引儀。號鶴溪。妣宜人豊山柳氏。龜村先生女。以萬曆己卯生公。
15. 「成均進士七里叟全公應參 墓碣銘」[34]
이류재(二柳齋) 진성(眞城) 이중수(李中洙, 1863 - 1946)[35]
"... 전씨는 고려조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학준(學浚)으로부터 나왔다. 중세에 판서(判書) 유(侑)는 관성(管城)을 식읍으로 받은즉 자손이 이로써 관향을 삼았다. 조부 희철(希哲)은 곧 휴계선생(休溪先生)으로 경태(景泰) 연간 육신(六臣)과 울며 작별하고 남쪽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졸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방산사(方山祠)에 제향하고 숙모전(肅慕殿)에 모셨다. 아버지 박(珀)은 참봉(參奉)이며 어머니는 영양김씨(英陽金氏)로 통찬(通贊)을 지낸 철우(哲友)의 따님이다.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공은 그 중 막내이다.
全氏起於高麗領同正諱學浚。中世有判諱侑。食采管城。子孫仍貫。祖希哲。卽休溪先生。景泰間。泣別六臣。南下以歿。世後人。享方山祠。配肅慕殿廡。考珀參奉。妣恭人英陽金氏。通贊哲友女。擧五男。公季也。
16. 「朝奉大夫行軍器寺副正東岡宋公墓碣銘」[36]
채산(蔡山)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 1874 - 1961)[37]
"...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영천민씨(榮川閔氏)로 부사(府使)를 지낸 용(墉)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인창(仁昌)은 검상사인(檢詳舍人)에 올랐고 원창(元昌)은 형조(刑曹) 정랑(正郞)을 지냈다. 사위는 강시(姜耆), 판관(判官)인 문손관(文孫貫), 시직(侍直)인 권경석(權景石)이다. 사인(舍人, 송인창)의 아들 양(陽)은 충찬위(忠贊衛)의 벼슬을 지냈고 사위는 각각 주부(主簿)인 류총기(柳㧾技)와 부제학(副提學)인 김종(金悰)이다. 정랑(正郞, 원창)의 아들 경(經)은 현감이고, 또 다른 아들로 열(烈)이 있다. 사위는 권홍계(權弘啓)와 종묘(宗廟) 령(令)인 권이(權邇)이다. 문판관(文判官, 문손관)의 아들은 속명(續命)이며 딸은 전희철(全希哲)에게 시집갔다. 권시직(權侍直, 권경석)의 아들은 균(鈞), 명(銘), 흠(欽)이다. 권종묘령(權宗廟令, 권이)의 아들은 주(柱)이다. 증현손 이하는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
配淑人榮川閔氏。府使墉女。有二男。仁昌檢詳舍人。元昌刑曹正郞。女婿姜耆。文孫貫判官。權景石侍直。舍人男陽忠贊衛。女婿柳㧾技主簿。金悰副提學。正郞男經縣監。烈。女婿權弘啓。權邇宗廟令。文判官男續命。女婿全希哲。權侍直男鈞。銘。欽。權宗廟令男柱。曾玄以下多不能錄。
◈ 참고자료
유교넷(http://ugyo.net)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1] 휴계선생의 사위인 눌재(訥齋) 송석충(宋碩忠)의 유사이다.
※ 송석충(宋碩忠, 1454 - 1524): 자(字)는 원로(元老), 호(號)는 눌재(訥齋). 본관 야성(冶城).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종 정유년(1477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무오사화를 피해 경북 영주로 은거했다.
[2] 송희규(宋希奎, 1494 - 1558):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야계(倻溪),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 야성(冶城). 송석충의 백부 직장(直長) 송소(宋紹)의 손자이다.
[3] 휴계선생의 사위 눌재 송석충의 묘갈명이다.
[4] 박승임(朴承任, 1517 - 1586): 자(字)는 중보(重甫), 호(號)는 소고(嘯皐).
[5] 실제로는 부록사(副錄事) 예(禮)의 손녀, 봉례랑(奉禮郞) 귀덕(貴德)의 증손, 전서(典書) 광운(光韻, 혹은 光遠)의 현손이다.
[6] 휴계선생의 외손이자 눌재 송석충의 아들인 송엄(宋儼)의 묘갈명이다.
※ 송엄(宋儼, 1486 - 1571): 자(字)는 사중(思仲).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僉知)에 제수되었다. 습독(習讀)을 지낸 안동(安東) 권억령(權億齡)의 딸과 혼인하였다.
[7] 오운(吳澐, 1540 - 1617): 자(字)는 대원(大源), 호(號)는 죽유(竹牖).
[8] 휴계선생의 증손 학계(鶴溪) 전해(全海)의 묘갈명이다.
※ 전해(全海, 1536 - 1602): 자(字)는 대용(大容), 호(號)는 학계(鶴溪). 옥천전씨 이계파(伊溪派). 한성참군(漢城參軍)으로 재직시 재상(宰相)의 오만함을 목도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자연에 묻혀 지냈다.
[9] 김굉(金㙆, 1739 - 1816): 자(字)는 자야(子野), 호(號)는 구와(龜窩).
[10] 휴계선생의 8대손 경묵재(敬默齋) 전창정(全昌鼎)의 가장이다.
※ 전창정(全昌鼎, 1700 - 1780): 초휘(初諱)는 수정(守鼎), 자(字)는 이삼(而三), 호(號)는 경묵재(敬默齋). 옥천전씨 만촌파(晩村派). 효행이 있어 관찰사(觀察使) 문헌공(文憲公)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이 조정에 부역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인천(仁川) 이영태(李英泰)의 딸과 혼인하였다.
[11] 하시찬(夏時贊, 1750 - 1828): 자(字)는 경양(景襄), 호(號)는 열암(悅菴).
[12] 휴계선생의 5대손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의 행장이다.
※ 전익희(全益禧, 1598 - 1659): 자(字)는 자수(子綏), 호(號)는 설월당(雪月堂). 옥천전씨 망동파(望洞派). 인조 갑자년(1624년)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특히 고을을 다스리는 데 치적이 있어 봉산(鳳山) 현감(縣監)을 지낸 뒤에는 읍인(邑人)이 애민비(愛民碑)를 세웠고 선산(善山) 부사(府使)를 역임한 뒤에는 부민(府民)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전배(前配)는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을 지낸 선성(宣城) 김우익(金友益)의 딸이며, 계배(繼配)는 영천(榮川) 민각(閔覺)의 딸이다.
[13] 이인행(李仁行, 1758 - 1833): 자(字)는 공택(公宅), 호(號)는 신야(新野).
[14] 현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 휴천(休川) 일대를 말한다.
[15] 휴계선생의 5대손 대송헌(對松軒) 전익수(全益遂)의 행장이다.
※ 전익수(全益遂, 1610 - 1682): 자(字)는 자현(子顯), 호(號)는 대송헌(對松軒). 옥천전씨 망동파(望洞派).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掌樂院) 정(正)으로 추증되었다. 지사(知事)를 지낸 순흥(順興) 안식(安植)의 딸과 혼인하였다.
[16] 강필효(姜必孝, 1764 - 1848): 자(字)는 중순(仲順), 호(號)는 해은(海隱).
[17]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 일대의 별호(別號)이다.
[18] 현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 상망동(上望洞)을 말한다.
[19] 휴계선생의 5대손 설월당 전익희의 묘갈명이다.
[20] 박시원(朴時源, 1764 - 1842): 자(字)는 치실(穉實), 호(號)는 일포(逸圃).
[21] 휴계선생의 10대손 전중발의 행장이다.
※ 전중발(全重發, 1763 - 1811): 자(字)는 여실(汝實). 옥천전씨 거촌파(巨村派). 3년 시묘(侍墓) 할 때 샘이 솟고 호랑이가 묘소를 수호하는 조짐이 있어 사람들이 이를 두고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 하였다. 관원이 이에 탄복하여 제수를 지원하였다. 전배(前配)는 안동(安東) 권익모(權益模)의 딸이며, 계배(繼配)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22] 현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읍(奉化邑) 거촌리(巨村里)를 말한다.
[23] 휴계선생의 5대손 고산(孤山) 전설(全渫)의 행장이다.
※ 전설(全渫, 1563 - 1609): 자(字)는 시응(時應), 호(號)는 고산(孤山). 옥천전씨 학촌파(鶴村派). 읍청당(挹淸堂) 박사종(朴嗣宗)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창의(倡義)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가 방해하여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 여러 선비들과 덕업계(德業契)를 만들었다. 참봉(參奉)을 지낸 밀양(密陽) 박린(朴璘)의 딸과 혼인했다.
[24] 이지수(李趾秀, 1779 - 1842): 자(字)는 계린(季麟), 호(號)는 중산재(重山齋).
[25] 휴계선생의 손자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의 묘갈명이다.
※ 전응방(全應房, 1493 - 1556): 자(字)는 이기(而紀), 호(號)는 고산(野翁). 옥천전씨 구천파(龜川派). 일찍이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세도(世道)가 맑지 않음을 알고 은거하였다. 자연을 사랑하여 야옹정(野翁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여기에 저월당(貯月塘), 장춘오(藏春塢)라는 편액 두 개와 사운시(四韻詩)를 써주었다.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구천리(九川里) 일대에 살기 시작했다. 이조(吏曹) 판서(判書)에 추증된 풍산(豊山) 류자온(柳子溫)의 딸과 혼인했다.
[26] 이만익(李晩翊, 1799 - ? ): 자(字)는 형진(亨進), 호(號)는 가간(可澗).
[27] 휴계선생의 8대손 문회와(文會窩) 전시만(全始萬)의 묘표이다.
※ 전시만(全始萬, 1652 - 1717): 자(字)는 성재(盛哉), 호(號)는 문회와(文會窩). 옥천전씨 학촌파(鶴村派). 효행과 재예(才藝)로 지역 유림의 추천을 받았다. 영일(迎日) 정지영(鄭之泳)의 딸과 혼인했다.
[28] 송병선(宋秉璿, 1836 - 1905): 자(字)는 화옥(華玉), 호(號)는 연재(淵齋), 시호는 문충(文忠). 건국훈장(建國勳章) 독립장(獨立章) 수훈.
[29] 송치규(宋穉圭, 1759~1838): 자(字)는 기옥(奇玉), 호(號)는 강재(剛齋),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 은진(恩津).
[30] 휴계선생의 증손 설봉(雪峰) 전주(全宙)의 묘갈명이다.
※ 전주(全宙, 1501 - 1559): 자(字)는 태허(太虛), 호(號)는 설봉(雪峰). 옥천전씨 이곡파(伊谷派). 마애(磨厓) 권예(權輗)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외직을 두루 거쳤다. 맏조카가 적자 없이 요절하자 동생 전안(全安)에게 재산을 주고 봉사(奉祀)할 것을 부탁하니 사람들이 태백(泰伯), 중옹(仲雍)의 고사에 견주었다.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 이산면(伊山面) 지동리(池洞里) 일대에 살기 시작했다. 전배(前配)는 하음이씨(河陰李氏)이며, 계배(繼配)는 진사(進士) 영천(榮川) 민우상(閔友商)의 딸이다.
[31] 이만규(李晩煃, 1845 - 1920): 자(字)는 순칙(順則), 호(號)는 류천(柳川).
[32] 현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양산면(陽山面) 일대.
[33] 휴계선생의 현손 채지재(採芝齋) 전이헌(全彝憲)의 묘갈명이다.
※ 전이헌(全彝憲, 1579 - 1661): 자(字)는 윤보(倫甫), 호(號)는 채지재(採芝齋). 옥천전씨 구천파(龜川派).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종조(從祖)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이 적자녀가 없고 서자도 무후라 후사를 이었다. 첨정(僉正)을 지낸 전의(全義) 이철(李徹)의 딸과 혼인하였다.
[34] 휴계선생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