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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현감(洪原縣監) 옥천(沃川) 전주(全宙) 묘갈명(墓碣銘) 본문
홍원현감(洪原縣監) 옥천(沃川) 전주(全宙) 묘갈명(墓碣銘)
유천(柳川) 이만규(李晩煃, 1845-1920)
판관(判官)을 지내고 호(號)가 설봉(雪峰)인 전(全)공의 휘(諱)는 주(宙)이고 자(字)는 태허(太虛)이니, 신라(新羅) 때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진 전선(全愃)이 그 윗 조상이다.
고려(高麗) 초 전이갑(全以甲)은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공훈이 있었고 견훤(甄萱)의 난(亂)에 순절하니 시호(諡號)가 충렬(忠烈)이었다. 전유(全侑)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진즉 자손들이 옥천(沃川)을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朝鮮)에 이르러 전귀덕(全貴德)은 통례문(通禮門) 봉례(奉禮)를 역임했고 그 아들 전예(全禮)는 지인(知印) 가각부록사(架閣副錄事)를 지냈다. 전예의 아들 전희철(全希哲)은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고 무과(武科)에 올라 관직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는데,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울면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사람들과 작별하고는 옥천에서 영주(榮州)로 이거(移居)하여 호를 휴계(休溪)라 했다. 전희철의 아들 전호(全琥)는 생원(生員)으로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덕유산(德裕山)으로 피해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 아들 전사영(全賜穎)은 사과(司果)의 관직에 올랐으며 부사(府使)를 지낸 유경(庾京)의 따님 무장(茂長) 유씨(庾氏)를 아내로 맞아 홍치(弘治) 신유년(辛酉年, 1501년) 어느 달 어느 날에 옥천 양산리(陽山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재질(材質)이 영민(英敏)하고 모습과 행동거지가 무거워 7, 8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도 위엄 있음이 거인(巨人)과 같았다. 권면하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경전의 뜻을 깊이 탐구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하여 마애(磨厓) 권예(權輗, 1495-1549) 선생으로부터 자주 칭찬을 들었다. 매양 시경(詩經)의 추우(騶虞) 장을 읊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는 어질고 후덕한 그 마음이 시의 뜻과 부합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쉴 때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하여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년) 무과에 올라 계사년(癸巳年, 1533년)에는 군기시(軍器寺) 첨사(僉事)가 되었고, 병신년(丙申年, 1536년)에 인의(引儀)에 제수되었다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온성(穩城)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니 고을을 다스림에 남다른 치적이 있었다.
기해년(己亥年, 1539년)에는 강릉(江陵) 판관(判官)으로 옮겼는데, 이때 큰 조카(전우(全宇)의 아들 전천석(全天錫))가 적자(嫡子) 없이 요절하였다. 공이 아우 전안(全安)에게 이르기를 "형님은 어질고 후덕한 분이라 응당 대가 끊기도록 놔둘 수 없네. 그런데 내겐 아들이 없고, 관직에 있어 집에 있을 날이 잘 없네. 이제 몇 마지기 농토를 자네에게 붙여줄 터이니 이로써 부지런하고 효성스럽게 제사를 받들게나" 하고는 이내 부임지로 떠났다. 이는 아우 전안에게 아들이 있어 종통을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니 여러 사람들도 그 뜻을 따라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임지로부터 돌아와서는 영주 이곡리(伊谷里, 현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 이산면(伊山面) 지동리(池洞里) 이르실)에 살 곳을 정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542년)에 홍원(洪原)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서는 유술(儒術)을 우선하여 고을을 다스리니 선비의 기풍이 다함이 없었다. 돌아올 때가 되자 백성들이 그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웠다. 이후로는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후학을 기르고자 하여 원근(遠近) 고을로부터 사람을 불러모아 가르치니 이룬 바가 많았다.
기미년(己未年, 1559년)에 졸(卒)하니 향년 59세였다. 살던 곳 뒤편에 있는 시랑산(侍郞山) 남쪽 기슭 아래 오향(午向)으로 장사지냈다.
전배(前配)는 하음(河陰) 이씨(李氏)인데 묘소를 잃어버렸다.
후배(後配)는 영천(榮川) 민씨(閔氏)이니, 진사(進士)에 오른 민우상(閔友商)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어 칭송받았다. 공과 같은 곳에 장사지냈다.
아들이 없어 아우 전안의 아들 전천기(全天紀)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전천기는 예빈시(禮賓寺) 봉사(奉事)를 지냈는데 효행이 있어 후세 사람들이 그가 여막(廬幕)을 짓고 상을 치른 곳을 '빈소골(殯洞)'이라 불렀다. 전천기의 첫째 아들 전광(全洸)은 후사가 없었고 둘째 아들 전발(全潑)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냈다. 두 딸은 교수(敎授)를 지낸 이윤적(李允迪, 본관 진성(眞城))과 참봉(參奉)을 지낸 금의순(琴義筍, 본관 봉화(奉化))에게 각각 시집갔다. 전발의 아들 전유승(全有承)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아들로 전갑승(全甲承)을 두었다. 전유승의 첫째 아들 전명열(全命說)은 유망(儒望)이 있었다. 둘째 아들로는 전명윤(全命尹), 셋째 아들로는 전명석(全命奭), 넷째 아들로는 전명량(全命亮)을 두었으니 호종(護宗)의 행실이 있었다. 전명열의 아들은 전성삼(全省三), 전계삼(全戒三), 전달삼(全達三)이고 전명윤의 아들은 전경삼(全景三), 전우삼(全友三)이며, 전명석의 아들은 전덕삼(全德三), 전명량의 아들은 전신삼(全愼三)이다. 전계삼의 첫째 아들은 전수산(全壽山)으로 전성삼의 후사를 이었으며 진사(進士)를 지냈다. 둘째 아들은 전수억(全壽億)이다. 전달삼의 아들은 전수만(全壽萬)이다. 전경삼의 아들은 전수악(全壽岳)이고, 전우삼의 아들은 전기수(全箕壽)이다. 전덕삼의 아들은 전수봉(全壽鳳), 전수대(全壽岱)이고 전신삼의 아들은 전수태(全壽泰), 전수성(全壽聖)이다. 전수산의 아들 전필구(全必銶)는 진사(進士)에 올랐고, 전필기(全必錡)는 역시 진사(進士)로 전수억의 후사를 이었으니 사람들이 소씨(蘇氏) 형제에 비유했다. 다른 아들로 전필현(全必鉉), 전필남(全必(金+南))이 있었는데 전필남은 다른 집안의 후사를 잇기 위해 출계했다. 그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집안을 다스리니 집안의 도리가 융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니 그 풍속이 교화되었다. 이러한즉 기타 사실(事實)과 행적은 전해올 것이 많겠으나 세대(世代)가 멀고 잦은 병화(兵火)로 기송(杞宋)의 고증할 수 없는 일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묘소 앞의 작은 비석은 마멸된지 오래되어 글자를 판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손인 전우교(全遇喬)[1]가 이를 염려하여 전형석(全亨錫)[2]과 논의하여 전규욱(全奎頊)[3], 전하석(全夏錫)[4], 전규휘(全奎輝)[5], 전영석(全永錫)[6], 전구하(全龜河)[7], 전규철(全奎轍)[8], 전후석(全垕錫), 전위하(全緯河)[9], 전경하(全景河)[10], 전용하(全龍河)[11], 전정구(全定九)[12], 전학구(全學九)[13]등과 함께 비석을 고쳐세울 것을 계획하였다. 가승(家乘)을 수습하고 몇 가지 보고 들은 바를 모아 내게 가져와서 명문(銘文)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처음엔 사양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가져온 자료에 의지해 명문을 지어 붙인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계통을 잇는 속례(俗例)를 따르지 않고 종사(宗嗣)를 세웠다네. 또 능력있는 어린 학도들을 널리 불러모아 선류(善類)로 만들었다네. 이 모든 것 추우(騶虞)의 인의(仁義)로부터 얻게 된 것이지. 옛 흔적 기록 없음 애석하도다. 하여 비석에 글을 새로 새기노라."
숭정(崇禎) 기원후 다섯번째 경신년(庚申年, 1920년) 단오날
통훈대부(通訓大夫) 전(前)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敎理)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經筵) 시독관(侍讀官)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동학교수(東學敎授) 이만규(李晩煃, 1845-1920)[14] 지음
[주석]
[1] 전우교(全遇喬, 1866-1938): 字 자화(子華). 號 지재(志齋). 전명열 后.
[2] 전형석(全亨錫, 1874-1926): 字 상중(常仲). 전명량 后
[3] 전규욱(全奎頊, 1859-1930): 字 근원(謹元). 전명량 后
[4] 전하석(全夏錫, 1860-1928): 字 내범(乃範). 전명량 后
[5] 전규휘(全奎輝, 1861-1934): 字 명서(明瑞). 전명량 后
[6] 전영석(全永錫, 1864-1947): 字 윤조(胤祚). 전명량 后
[7] 전구하(全龜河, 1870-1945): 字 영로(靈老). 號 동은(東隱). 전명열 后.
[8] 전규철(全奎轍, 1880-1960): 字 사유(士由). 전명량 后
[9] 전위하(全緯河, 1883-1957): 字 찬경(纘卿). 官 참봉(參奉). 전명열 后.
[10] 전경하(全景河, 1880-1922): 字 우서(禹瑞). 官 참봉(參奉). 전명윤 后
[11] 전용하(全龍河, 1890-1961): 字 성서(聖瑞). 號 회은(晦隱). 전명량 后
[12] 전정구(全定九, 1885-1964): 字 진화(振和). 전명윤 后
[13] 전학구(全學九, 1887-1973): 字 치명(致明). 官 참봉(參奉). 전명윤 后
[14] 이만규(李晩煃, 1845-1920): 初諱 이만효(李晩孝). 字 순칙(順則). 號 유천(柳川). 本貫 진성(眞城).
[원문]
判官號雪峰 全公諱宙 字太虛 新羅旌善君諱愃 其上祖也.
麗初諱以甲 佐太祖有勳 殉節於甄萱之亂 諡忠烈. 諱侑 版圖判書 封管城君 子孫因以氏焉. 入本朝 諱貴德 通禮門奉禮. 子諱禮 知印架閣副錄事. 子諱希哲 生進武科 官止司直 端廟遜位 泣別成朴諸公 自沃移榮 號休溪. 子諱琥 生員僉正 戊午禍作 避居德裕山中 以終老. 子諱賜穎 司果 娶茂長庾氏 府使諱京女 以弘治辛酉某月日 生公于沃川陽山里第.
材質英敏 儀表凝重 髫齔屹然如巨人. 不待勸督 向學無倦. 窮尋經義 多所自解. 亟蒙獎詡於磨厓權公輗. 每好誦詩傳騶虞章. 盖仁厚之心 有合於詩意也.
講習之暇 傍通弓馬. 嘉靖癸未 登虎榜. 癸巳知軍器寺僉事. 丙申拜引儀. 歷宣傳官. 出守穩城 治有異績.
己亥遷江陵判官. 時長侄旡子而夭. 公謂弟安曰 伯氏仁厚 義不可絶嗣. 而我姑無子 且有官守 在家無日. 今以數頃薄田 付君 君其克勤孝祀 遂赴任. 盖以季公有子 可系宗也. 衆服其義.
尋自任所 卜居于榮之伊谷里. 壬寅遷洪原 治政以儒術爲先 士風丕振. 及歸 民立石以頌. 自後 更不向仕路一步. 好獎進後生 招延遠近 多所成就.
己未十月三日卒 享年五十九. 葬所居後侍郞山南麓下向午原.
配河陰李氏 失墓所. 榮川閔氏 進士友商女 以婦德見稱 葬同原.
旡子 以弟安子天紀嗣 禮賓寺奉事 有孝行 後人名其廬墓處 曰殯洞. 男洸旡后. 潑承仕郞. 女李允迪敎授 琴義筍參奉. 潑男有承 丙子後 隱居不出. 甲承. 有承男命說 有儒望. 命尹. 命奭. 命亮 有護宗特行. 命說男 省三 戒三 達三. 命尹男 景三 友三. 命奭男 德三. 命亮男 愼三. 戒三男 壽山 嗣省三 進士. 壽億. 達三男 壽萬. 景三男 壽岳. 友三男 箕壽. 德三男 壽鳳 壽岱. 愼三男 壽泰 壽聖. 壽山男 必銶 進士. 必錡 進士 嗣壽億. 人比之蘇氏兄弟. 必鉉. 必(金+南)出. 以下不錄.
於乎 公以文武兼備之才 政家而家道肥 莅民而俗化. 其他事行 心多可傳. 而世代寢遠 兵燹屢經 並屬杞宋之無徵. 墓前短碣 缺泐已久 不辨字形. 後孫遇喬 惟是之懼 謀於亨錫 與奎頊 夏錫 奎輝 永錫 龜河 奎轍 垕錫 緯河 景河 龍河 定九 學九等 爲改竪計. 掇拾家乘 及聞見若干條 來余責銘文. 旣苦辭不獲 乃依而叙之 系以銘. 銘曰 旣不援兄亡弟及之俗例 以立宗嗣. 又廣延可與有爲之蒙士 俾成善類. 其有得乎騶虞之仁義也. 可惜古蹟之無記. 玆用新刻兮表隧.
崇禎紀元後五庚申 端陽月日 通訓大夫 前弘文館副敎理知製敎 兼經筵侍讀官 春秋館記注官 東學敎授 李晩煃 撰.
출처: 유교넷-영주금석문전집
(http://www.ugyo.net/mt/bok/bokMain.jsp?CLSS=3&sBookNmbr=B103&sMok_Nmbr=70&SH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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