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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東鶴寺) 회중(會中)에 답함 본문

옥천전씨 문헌

동학사(東鶴寺) 회중(會中)에 답함

온비추리 2018. 12. 7. 20:32

동학사(東鶴寺) 회중(會中)에 답함


회산(晦山) 이근춘(李根春, 1883-1954)[1]


엎드려 생각건대 명분과 절의를 기리고 높이는 것은 진실로 군신(君臣)을 함께 제사지내는 뜻에 부합하는 일이고아름다운 풍속을 세우는 일은 가히 사림(士林) 백세(百世)의 의론을 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숙모전(肅慕殿)에 추배(追配)된 신위(神位)에는 단종조(端宗朝)의 충신(忠臣) 아닌 이가 없는데 휴계(休溪) 전선생(全先生)께서 홀로 바친 충의와 그 깊은 절개는 아직 제향(躋享)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으니 이 어찌 밝은 시대의 흠결이요, 후세 사람들의 유감이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휘()는 희철(希哲)이니 옥천인(沃川人)입니다. 성품이 강직(剛直)했고 검약(儉約)한 생활을 지켰습니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사직(司直)에 제수되어 그 앞길이 창창하였지만 단종께서 물러나신 날 남쪽으로 낙향하여 영주(榮州) 휴계(休溪)[2]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영주는 (단종께서 계셨던) 영월(寧越)과 경계를 접한 곳이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음성과 기운이 서린 곳이었기 때문입니다이 날로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병을 칭하며 거듭된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선생께서는 매일 밤 관대(冠帶)를 정돈하고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으며 상왕(上王, 단종)께서 승하하시자 3년을 복상(服喪)하고 자정(自靖)의 예를 지켰습니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자손들에게 분부하길 해마다 한 번은 동을지(冬乙旨)[3]를 배알하여 식별(識別)하라 하였습니다.


, 선생의 이러한 위적(偉蹟)은 이미 장릉지(莊陵誌)와 여러 현인(賢人)의 저술에 드러나 있어 지금도 능히 상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포숭(褒崇)의 은전이 천도(泉塗)까지 미치지 못했을 뿐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금령(禁令)으로 선생을 배향하던 곳마저 훼철되어[4] 그 당시 선생의 심사(心事)를 다시 증향(證嚮)하거나 후세에 드러내 보일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본손(本孫)이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여 생긴 일일 뿐 아니라 공히 우리 유림(儒林)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아, 슬픕니다! 세도(世道)가 변하고 유학의 풍조가 훼손된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다만 귀향(貴鄕) 학암(鶴巖)[5] 위에 전무(殿廡)가 우뚝 솟아있어 열성조(列聖朝)의 옛 은전을 좇으므로 충혼(忠魂의백(義魄)이 좌우로 오르내리고 있으니 여기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그 은덕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제회(齊會)에서 의견을 구하여 저희와 같은 결론을 얻었으니 번잡한 예식(禮式)을 재거(載擧)함은 실로 여러분의 정중한 의론을 따르는 것입니다이제 숙모전(肅慕殿) 대향(大享)의 자리에 전선생(全先生)을 함께 배향하여 명분과 절의를 기리고 아름다운 풍속을 세우는 자리로 삼는다면 세도(世道)의 다행한 일이고, 우리 유림(儒林)의 다행일 것입니다



[주석]


[1] 이근춘(李根春, 1883-1954): 字 인수(仁叟). 號 회산(晦山). 本貫 우계(羽溪). 본문은 회산선생이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을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할 것을 청하며 보낸 서신이다.

[2] 現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 휴천(休川) 일대.

[3] 現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영월읍(寧越邑) 영흥리(永興里) 단종릉 장릉(莊陵).

[4] 구한말 철폐령으로 휴계 전희철을 모시던 방산서원(方山書院)이 훼철된 것을 말함.

[5] 現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반포면(反浦面) 학봉리(鶴峰里) 



[원문]


答東鶴寺會中


伏以 褒崇名節 允合君臣一體之祀. 扶樹風聲 可采士林百世之論.


欽惟我肅慕殿 追配之位 莫非端廟朝忠義之臣. 而以若休溪全先生之孤忠邃節 尙未與躋享之列. 是豈非晠代之欠典 而後人之遺憾也耶.


先生諱希哲 沃川人. 素性剛直 克守儉約. 弱冠俱中生進 蔭補司直. 晉途將大闢 而値端廟遯位之日 南下居于榮州之休溪. 榮是越州接壤之地 而錦城聲氣之鄕也. 自是杜門稱病 屢召不起. 每夜整冠帶 北向稽首. 及夫上王昇遐 服喪三年 以守自靖之義. 臨歿申戒子孫 使之歲一謁冬乙旨 以識別焉.


噫 先生之前後偉蹟 已著於莊陵誌 及諸賢叙述中. 至今斑斑可攷 而褒之典. 旣未及於泉塗 尸祝之所 又見撤於邦禁. 先生之當日心事 無復證嚮表顯於後世. 則是不惟本孫之未遑之擧 而爲吾林者與共責焉.


嗚乎 世道之變嬗 斯文之墜喪 莫此時甚. 而惟貴鄕鶴巖上 巋然殿廡 遹追列聖朝舊典 忠魂義魄左右陟降. 則先生之妥靈崇報 舍是 將何以哉.


竊念 齊會籲通粗表生等同得之衷 而載擧縟禮 亶係僉尊鄭重之論. 今於肅慕殿 大享之席 亟行全先生幷腏之擧 以爲褒名節 樹風聲之地. 世道幸甚. 吾林幸甚.




출처: 유교넷-영남사림문집 상세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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